오전 열 시. 조퇴를 신청했다. 사유는 '개인 사정'. 신청서에 간단한 인적사항과 사유를 적어 제출하고 현장을 빠져나와 사물함까지 쏜살같이 달려갔다. 영하 10도의 날씨마저도 따뜻하게 느껴질 만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척 가뿐하고 즐거웠다.
오늘 조퇴를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려둔 제품이 팔려 택배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요즘 택배 파업 및 명절 시즌이 겹쳐 배송 기간이 한없이 늘어지기 때문에 거래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사실 엄마에게 부탁하면 그만이었지만 "고가 제품이라 내가 해야 마음이 편해" 핑계를 대며 조퇴를 했다. 회사는 나 하나 없어도 잘 돌아간다. 예전에 학교에서 근무할 당시엔 아파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가기 전엔 절대 조퇴하지 않았다. 이유인 즉, 조퇴를 하면 내 수업을 다른 선생님들이 대신 들어가야 했고 나 또한 이후 내가 못한 수업을 다시 채워야 했기 때문에 조퇴 후 여파가 너무 컸다. 하지만 지금 다니는 회사는 그런 게 없다. 내 존재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력이라는 사실이 이럴 땐 참 속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해서 택배까지 다 보내고 나니 오전 11시 50분이었다. 오랜만에 누리는 여유로움에 깊은 행복감을 느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난 후 서재에서 꼼작 않고 앉아 오늘까지 내가 해야 할 것들을 하나 둘 해나갔다. 오늘은 포스팅 2개를 썼고, 샤워를 마치고 지금은 백백 프로젝트 16일째 글을 쓰고 있다. 이미 조퇴하는 길에 16일째 글은 조퇴에 관한 걸 쓰겠노라 정해놓았다.
학창시절 나는 1년에 딱 한 번은 무조건 조퇴를 했다. 그 정도 일탈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프지도 않은데 괜히 아픈 척을 해대며 선생님을 속였다. 평소 타의 모범이 될 정도의 모범생이었기에 선생님은 나의 꾀병을 쉽게 믿어주셨다. 부모님이 모두 출근해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가 만화책을 잔뜩 꺼내놓고 과자도 두어 봉지 터놓고 혼자만의 일탈을 즐겼다. 엄마는 내가 조퇴를 한 걸 알았지만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 그냥 아팠겠거니 했던 것 같다.
사회인이 되고 나선 단순히 아프다는 이유로 조퇴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아니 조퇴가 가능하지만 그 이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만만치 않음을 깨닫고 난 후부턴 조퇴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참고하다 보면 아픈 것도 잊어졌다. 그런데 오늘 나는 별 일 아닌 일로 조퇴를 했다.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마치 학창 시절에 '선생님! 아파서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조퇴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정말 아프다가도 조퇴증 받고 학교 밖으로 나서는 순간 병이 낫는다는 거다.
오늘은 아프지도 않았지만 조퇴를 했다. 해도 따뜻하고 버스까지 곧바로 와주니 기가막히게 운이 좋은 날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회사를 다니는 지금도 조퇴는 참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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